권호근 선생님의 월요편지

우현산방에서의 하루

오직 하나뿐인 그대 2023. 3. 21. 09:47

산속에서 아침을 알리는 것은 요란한 새 울음소리입니다. 일어나면 우선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덕유산 향적봉을 바라보며 말러 교향곡을 듣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합니다. 평소 베토벤을 존경했던 20세기 천재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1860-1911)는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9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5번 교향곡은 베토벤 5번 운명 교향곡에 비견되는 곡입니다. 운명 교향곡은 운명의 문을 두드리는 강렬하고 비장한 도입부로 시작하는데 말러 교향곡 5번 도입부는 환희에 찬 강렬한 금관악기 팡파레로 시작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비엔나 사교계의 여왕인 엠마(1902-1911)가 말러의 청혼을 받아들인 후 말러가 환희에 차서 작곡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렵게 쟁취한 엠마와의 결혼 생활은 엠마의 외도로 말러를 괴롭히고 파경 맞습니다. 비록 이혼하였지만 엠마가 죽은 후에 비엔나 중앙 묘지 음악가 묘역에 있는 말러의 무덤 옆에 묻힌 것을 보면 말러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았나 봅니다. 하루의 시작을 말러 교향곡 5번의 환희에 찬 강렬한 팡파레로 시작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아침 식사 전에는 한 시간 정도 명상을 하는데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으로 인해 마음을 비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잡초 뽑기와 매화나무 가지치기를 하다가 깨달은 것은 마음을 비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손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가지치기 하기 위해 톱질을 하거나 잡초 뽑기를 하다 보면 무념무상 상태로 한두 시간이 그냥 지나갑니다. 원래 시간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고서 세월의 흐름을 한탄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치과 치료도 손에 집중하는 일이기 때문에 치료를 한다기보다는 명상한다고 생각하면 시간도 잘 가고 덜 힘들고 정신 건강에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산중 생활하면서 깨달은 것 중의 하나가 대화와 표현의 중요성입니다. 산속에 있다 보면 종일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므로 묵언을 하게 됩니다. 처음 삼사일은 말을 안 하고 지내는 것이 마음이 편했는데 오일째 정도 되면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하고 싶어집니다. 독일 회화 표현주의 창시자인 키르히너의 다리파 창립 선언문을 보면 표현 욕망은 식욕, 성욕, 수면욕과 같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선언합니다. 내면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사회와 개인을 연결해주는 다리와 같은 것이므로 내면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리파는 미술 작업의 표현을 통하여 새로운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겠다는 선언을 합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다른 호모 종보다 신체적으로 약한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종을 제치고 최종 승자가 된 이유로 측두엽 발달로 인한 언어 소통 능력을 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대화를 통한 소통과 표현은 인류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표현의 자유를 인간의 기본권으로 우리나라 헌법에서도 보장하고 있습니다. 묵언은 정신 수양에는 도움을 주지만 창조적인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대화와 소통은 필수적입니다. 21세기에 가장 필요한 덕목은 대화와 소통 능력입니다. 치과대학 교육에서도 대화와 소통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현산방 매실밭에서 매향에 취해 망중한.

 

식수로 사용하는 우현산방 연지미 청정계곡.

 

우현산방 서실

 

2022.6.20

 

우현산방에서 권 호 근

 

이 글은 우현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게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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